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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4/2/2017

주일예배 조회 수 2134 추천 수 0 2017.04.03 09:26:42
다시 바라보는 십자가
the Message of the cross
고전1:18-25절
4/2/17
 
개나리와 라일락 향기 그윽한 뜻 깊은 4월이 시작 되었습니다.
영국 시인 엘리옷(T.S Eliot)는 1922년 발간된 “크라이테리언”(Criterrien)이라는 잡지 창간호 서문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 한 바 있습니다.
왜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인가?
이 땅에 많은 분들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기 때문입니다.
미국 링컨 대통령이 괴한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달(4/15)이고, 흑인 인권운동가 Luther King Pastor 암살된 달(4/2)이며, 독일 히틀러에 항거했던 본 훼퍼(Bonhoeffer) 목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달(4/9)입니다.
우리나라도 부정과 부패에 항거했던 4,19혁명의 달이기도 하고, 또 주 기철 목사님이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교하신 달(4/21) 이기도 합니다.
성서적으로는 주님께 인간의 죄를 대속키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신 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 십자가를 생각하며 십자가의 헌신을 다짐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영Mother Teresa)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에 대한 일화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매일 반복되는 수녀의 계율과 의무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도원 복도를 거닐면서 헤롯 뜰에서 채 직 맞는 예수님의 그림을 보았지만 무감각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 복도를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채 직을 맞는 그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서 예수님께서 날 위해 저토록 고통의 채 칙에 맞으신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의 가슴에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느낍니다. 수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끊고 긴 침묵의 기도를 드립니다.
테레사 수녀는 가슴속에 요동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감격을 안고 수도원을 떠나서 죽음의 도시 인도 캘커타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인도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어“니르말흐리다이” 즉 “죽어가는 사람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을 세워 45년간 길거리에서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극진히 간호했다. 그 결과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들이 일어나면서 그 집의 이름을 “살아 있는 집”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여러분
테레사 수녀는 4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았지만 예수님이 지신 그 고통의 십자가가 나에게 구원을 주신 그 감격을 잊고 무감각 하게 신앙생활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신앙생활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3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유대인의 시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꺼리 킴”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1:23)
왜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낌의 대상으로 보는 것일까요?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고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베스도, 벨렉스, 아그립바, 가이 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의 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본문22절입니다.
그들은 모세시대의 표적인 홍해사건과 시내 산에서 십계명 받음 그리고 죽지 않고 하늘로 오른 엘리야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린 엘리사 시대의 표적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오직 표적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를 죽인 십자가는 거리낌의 대상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거리낌으로 본 것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4년 2/21 개봉 했던 “패션오버크리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제작되어 전 세계 관객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정당들이 영화 개봉 금지(2004. 2)하라고 거칠게 항의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에 그들에게 거리낌 때문 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갈수록 자신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죄로 인하여 흩어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그 죄 값이 두려워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죄를 로마에게 돌리며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 마음 깊숙이 남아 있는 십자가에 대한 거리낌을 반영하는 증거가 아닙니까?
2. 헬라인의 시각입니다.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았습니다(1:18, 23)
왜 그랬을까요?
!) 십자가는 사형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최초로 만든 잔인한 사형 형틀인데 로마에서 받아들여 잔악한 사형수(정치범, 죄수)를 집행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헬라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심은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민족성이 있습니다.
최고의 학문으로 일컫는 철학이 헬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철학이란 말은 필로소피아란 말인데 피다고라스(Pythagoras, 582-492, B.C)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 뜻은 애지 자” 곧 “지혜를 사랑 한다”는 말입니다.
또 헬라인들은 웅변 수사를 좋아 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지적으로 학문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하면 설교에 귀를 기울 리지 않았습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 내에 헬라인을 대표하는 아볼로파가 있었지요. 아볼로는 웅변을 잘해서 헬라인들에게 인기를 얻어 교회 내 헬라 파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처럼 철학과 웅변을 좋아하는 헬라인들은 사형 틀인 십자가를 볼 때마다 무지한 흉악한 범죄자들을 연상하게 되고 미련한 것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을 지식으로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헬라 파 같이 부류의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참 신앙은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분명히 아는 지식 즉 logos와 그리고 그 아는 바를 가슴으로 고백하는 Fathos의 고백 그리고 내가 알고 고백한 바를 행함의 의지(will)가 동반될 행함(doing)이 될 때 참 성도가 되고 주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3. 성도의 시각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바라봅니다(1:18절, 23-24)
독인의 사상가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1380-1471.8)는 “십자가”를 이렇게 표현 한 바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는 생명이 있고 십자가에는 원수를 이기는 힘이 있고 십자가는 하늘의 행복이 있고 영혼의 능력이 있고 영혼의 즐거움이 있고 덕의 극치가 있고 영원한 완성이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의 악한 감정을 소주 한잔 먹으며 화해를 하곤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로 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고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있을까요?
한 잔의 술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 합니다. 오직 한길 즉 예수님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허시고, 화목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내가 화해가 되면 제일 먼저 대화의 창이 열립니다. 기도가 나옵니다. 나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말씀 드리고 또 문제를 해결 처방 받습니다. 때문에 나 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손을 잡고 주님이 인도해 주시는 복된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복된 성도가 되시 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구원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누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까? 부처, 공자, 알라. 조셉 스미스입니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토기에 불과 합니다.
때문에 구원의 길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구원의 길을 줄 수 있는데, 그 길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죽지 않고 영원한 구원의 보증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돌아가신 곳이 골고다 또는 갈보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히브리어 이고, 갈보리는 라틴어입니다. 그 뜻은 해골입니다.
제롬 이후에, 이곳에 해골이 많이 묻혀 있다는 뜻에서 유래를 가지기도 하고, 근래에 와서는 산모퉁이가 해골 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 명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갈보리 산 밑에는 예수의 부활하신 빈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헤브론으로 나가는 bus 터미널 종점이 있습니다.
이 종점 의미는 모든 인간의 생의 종착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며 동시에 죽음 후에 영생과 지옥의 갈림길이 있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죽지 않고 아픔도 고통도 눈물도 없는 천국에 덜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하십시오. 오직 십자가를 통해 내가 천국 갈 수 있는 십자가의 믿음을 소유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사랑과 용서와 섬김의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타 종교나 철학에서 모든 종교의 사랑이 같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가령
불교의 자비(慈悲)는 부처의 마음과 연기의 깨달음에서 나오는 지혜인데 “자비”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들어 주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입니다.
유교의 인의 사랑 역시 인간의 본성이 어질다는 인(仁)에서 비롯된 도덕성 회복의 사랑으로 측은지심 즉 불쌍히 여기는 미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의 자비나 유교의 인의 사랑은 그 사랑이 추상적이고 이론적이며 깨달을 추구하지 구체적인 사랑의 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이론과 깨달음과 추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우주적 사랑인 동시에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신(롬5:8) 아가페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어느 누가 자기 몸을 던져 사랑을 표현한 종교 지도자가 주님 외에 누가 있습니까?
또한 주님의 십자가에서 끝없는 용서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침을 뱉고 창을 겨누고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무리를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주님의 용서는 조건 없는 무한한 용서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성육신(Incarnation) 했으며 최후에는 자신을 몸을 드려 십자가에 죽으심이 바로 나와 인간을 섬긴 본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능력으로 바라본다면 오늘부터 내 자신이 서 있는 가정 교회 삶의 자리에서 먼저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실천해 봅시다.
그곳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곳에 은혜와 축복이 임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만남과 놀라운 평화와 인도가 있습니다.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53장 5절에 그가 채 칙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십자가의 보혈이 떨어지는 곳에 새 살이 돋아나고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며 치료의 광선을 통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 날 줄 믿습니다.
교회 역사가 오리겐에 의하면 골고다에는 아담의 해골이 묻혀 있는데 그 해골에 제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떨어 질 때 일시에 생기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여러분! 질병을 치유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 아픈 곳에 자신이 손을 얻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 나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유와 평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53:5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고통의 징계를 받음으로 내 마음속에 죄와 죽음과 질병과 삶의 무거운 짐에서 평화를 주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사랑할 때 그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임할 줄 믿습니다.
끝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면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나에게 부여된 사명과 임무 그리고 내가 피할 수 없는 나만의 가시들입니다.
가령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에게 부여된 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기도, 전도, 봉사, 물질로 자기의 맡은 분야에서 남아 알라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면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그 헌신의 현장을 통해 그 심령에 놀라운 위로와 감사와 축복의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여러분
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그리고 자녀 관계에서 내가 짊어지고 내가 돌봐야 할 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데는 분명 고통과 희생과 수고가 동반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죠렌 키르케고르(kierkegaard)가 데칼트(Descartes)의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 한다”(Cogito ergo sum)명제를 수정하여, 내가 고통 한다 고로 내가 있다(l struggle, therefore l am)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길에는 내가 고통 하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가면 주님의 놀라운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령
주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시몬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아프리카 트리폴리에서 예루살렘 회당에 왔다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간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밤새 심한 고초를 당하였기 때문에 67Kg 가량 되는 십자가를 지고 14 gate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5번째 Gate 에서 쓰러집니다.
그때
어느 누구도 지기 싫어했던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대신 지고 간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결과 놀라운 축복 또한 받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죽음을 끝까지 목격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거룩한 죽음을 직접 보면서 자신이 구원함을 받았고 바로 자기 집으로 가서 온 가정을 구원하였으며 그리고 안디옥 시리아에 살고 있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 했습니다(행11:20) 다니엘서 보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약속의 축복을 받았습니다(단12:3). 
그의 자자손이 경건하며 영육간의 풍성한 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낮은 밤 보다 분명히 더 밝습니다. 그러나 밝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 하늘의 영롱한 별들은 오히려 어두움이 깔려야 더 밝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노라면 때로는 내 앞에 어두움이 깔릴 수 있습니다. 그 어두움이 때로는 홀로 눈물을 흘리고 홀로 밤잠을 설치고 지치고 홀로 아파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지만 끝까지 주님이 나에게 부여한 십자가 끝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십자가 고통의 터널을 지나면 찬란한 부활이 영광이 있듯이 주님의 시간에 내가 지고 간 그 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고 그 깨달음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의 삶에 풍성히 임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고통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새 소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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