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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8/20/2017

주일예배 조회 수 895 추천 수 0 2017.08.21 08:06:40
그리운 아리스다고
행19:26-35
8/20/17
저는 틈틈이 “나의 사랑 나의 목회”라는 수상록(隨想錄 essays)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가면서 그때 그 목회 현장에서 함께 했던 동역 자들의 모습이 그리워집니다.
92년도에 대만지역 선교 사역을 할 때 잊을 수 없는 신실한 동역 자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조 전도사입니다. 조 전도사는 여자 분으로 다리가 한 쪽이 없는 불구자였습니다. 그래서 목발 즉 클러치(crutches)짚고 다니면서 21동안 저와 함께 대만선교사역에 동행하면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그 녀는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를 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은 무보수로 늘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저를 그림자처럼 동행해 주었고 제 복음의 입이 되었습니다. 제가 울면 전도사님도 울었고 제가 기뻐 찬양하면 함께 기뻐 찬양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만 캬우슝 도시에서 저녁 대형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회는 대만 지역 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였으며 말씀과 찬양이 뜨겁게 역사한 성령 충만한 집회였습니다. 그 집회에서 의사라고 하는 분이 집회 중에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암이 치유 되었다고 간증까지 한 은혜로운 집회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교회당 뒤 쪽에서 성도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데 악수하는 제 손에 많은 분들이 돈을 손에 쥐어 주곤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돈이 얼마짜리 지폐 인지 또 얼마인지 도 모릅니다. 제가 받는 돈은 그날 밤 나의 복음이 입이 되어 준 전도사님께 몽땅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더 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조 전도사님을 생각하면 그림자처럼 봉사해 준 나의 그리운 신실한 복음의 동역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 "아리스다고"(Aristachus)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리스다고 는 신약성경에 오직 5 곳에 이름만 언급 될 뿐 특별한 사역 내용은 소개 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문헌을 통해 그의 인격과 사역을 생각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아리스다고는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성경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그를 떠나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동거 동락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리스다고를 그리워했습니다.
왜 바울이 그토록 아리스다고를 그리워했을까요?
그는 아름다운 인격과 인간미를 소유 한 신앙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격(人格, Personality)이 있습니다. 그 인격을 그 사람됨의 “품격”이라고 말합니다. 인격(품격)은 심리학에서는 어떤 심신의 변화에서 불구하고 동일하고 지속적인 자아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윤리학에서 행동하는 주체인 모습입니다. 법학에서는 독자적인 가치 인정의 소유자를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품격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 그리고 자아의 정체성에서 인간미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미란? 그 사람의 자아에서 남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발로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아리스다고는 그런 인간미가 있는 인물 이였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사람으로 유럽인이고 백인입니다. 반면 바울은 아시아인이고 외모가 왜소하고 병약하여 풍채 또한 초라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외모나 인종차별 의식을 가질 수 있으나 그는 외모나 인종이 아닌 한 사람의 인격을 바라보는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만날 수 있었고 그 결과 예수 믿고 구원의 축복을 얻었으며 바울의 동역 자 까지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인간미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가정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말의 인간미”가 있어야 합니다. 남의 눈에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기들보를 보는 자입니다. “행동의 인간미”가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봉사가 아니라 그림자처럼 빛처럼 소금처럼 행동하는 자입니다. “삶의 인간미”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지배의 도” 보다 “섬김의 도”를 보이는 자를 말합니다. 이 같은 인간미가 넘칠 때 성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는 배신과 배반이 없는 지속성의 인간미를 지닌 신앙인입니다.
“지속성의 자아”란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배신이 없는 일관된 인격을 말합니다.
속과 겉이 다르지 않습니다. 이중의 인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의 배반과 이중인격성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의 인격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섞은 인간 냄새가 풍깁니다.
그래서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것이 바로 배신과 배반의 아
픔입니다.
가령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향하여 그토록 사랑의 눈빛과 말씀을 주셨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배반의 장미였습니다.
바울 역시 모든 성도가 한 결 같이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의 곁을 떠나 버리고(딤후4:10)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많은 해를 입히므로 하나님이 그 행위대로 심판 한다고 하였다.(딤후4:14)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죽음도 고난의 박해 속에서도 결코 바울을 배반치 않았고 자신이 순교하는 순간까지 사도 바울과 함께 신실한 인간미를 소유한 자였습니다.
그는 성실성(誠實性)한 신앙인입니다.
성실성은 거짓 없이 진심(眞心)을 다하는 성격(性格) 소유한 자를 말합니다.
“성실한 인격”은 말과 행동이 바르고 어떤 일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아리스다고는 성실성을 지닌 인격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섬김에 있어 거짓 없는 전심으로 바울과 고통과 환난 그리고 죽음이 닥치는데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바울과 복음 사역을 위해 성실의 사명을 감당 했습니다.
그는 사명감의 신앙인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서 우상을 만들며 살던 이방인 이였습니다. 그가 제2차전도 여행 중에 있는 바울을 만납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자신의 새 생명의 구원을 주신 주님을 위해 헌신의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생각 하던 중에 사도 바울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어떤 생명의 위협과 고통 중에도 일사각오의 순교 정신으로 바울과 함께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리스다고의 아름다운 인간미 그리고 배신과 배반이 없고 복음사역에 성실과 사명감으로 함께 해준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가슴에 세 겨진 잊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왜 바울이 그토록 아리스고를 그리워했을까요?
첫째, 그는 바울의 동행자(同行者, Accompany)였기 때문입니다.
동행(同行)이란 말은 참 이름다운 말입니다.
동행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같이 다니는 사람”의 듯입니다.
여러분
내 평생 내 곁에 참 된 동행자가 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성도가 하늘나라 가는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다면 축복 중에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 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간 인물도 있습니다.
본문에 아리스다고는 순교하는 순간까지 바울과 복음을 위해 동행하였습니다.(행27:2) 그는 바울이 어떤 고통과 환난과 죽음에 머물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정신으로 바울을 그림자처럼 동행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함께 동행 했습니다.(행 19:29, 20:4, 27:2, 골 4:10, 몬 1:24) 그래서 누가는 아리스다고를 가리켜 “바울과 같이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19:29). 정말 바울과 아리스다고는 복음을 위한 아름다운 동행(Beautiful Accompany)자들 이었습니다.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평생 동행한 것은?
자신을 예수 믿게 한 영적인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바울이야 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복음의 사자이며 이방 사람을 구원키 위한 하나님이 부르신 복음의 큰 그릇이라는 깊은 신뢰와 확신을 했기 때문입니다.(롬1장, 행9:15)
마치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랐던 것과 비슷합니다.
룻은 어머니가 섬긴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요,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삶과 같았습니다.그래서 바울은 "나와 함께 하는 아리스다고"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부부를 “평생의 반려자”로 부릅니다. 때로는 가정이 힘들고 고난이 올 때도 그 동행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후일 여러분의 가슴에 아름다운 그리움이 충만해집니다. 신실한 친구와 함께 평생을 울고 웃는 관계라면 얼마나 이름다운 우정의 동행입니까? 목자와 성도가 복음을 위해 함께 동행 한다면 잊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남을 것입니다.
복음의 동행자가 되십시오. 구리 장색 알렉산더 같은 복음의 방해꾼의 자리에 서지 마십시오. 왜 그가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수도교회는 바울과 아리스다고와 같이 복음을 위해 아름다운 동행자들로 채워져서 서로의 가슴속에 보고 싶고 그리움으로 남는 성도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둘째, 그는 바울의 동역자(同役者) 였습니다.
“동역자”란 기독교에서 사용된 말로서 바울이 즐겨 사용한 단어입니다.
동역이란 말은 “Yoke fellow”란 말로 “함께 짐을 나누어진 자”를 의미합니다. 특히 Yoke은 “멍에” 란 뜻인데 짐승에게 짐을 끌도록 씌우고 멍에를 의미 합니다. 따라서 복음의 동역 자는 “복음을 위해 함께 멍에를 매는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 혹은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주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었고 여호수아에게는 갈렙 같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빌리그레이엄 목사는 “300명의 기도의 동역 자”들이 있었고 디엘 무디 목사님은 생키 같은 신실한 찬양의 동역자가 함께 했습니다.  
바울 역시 이방 사도로써 그 사명을 감당함에는 많은 신실한 동역 자 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롬 16:3) 디모데(살전 3:2) 에바브로 디도(빌 2:25) 빌레몬(몬 1:1), 두기고 같은 많은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본문에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신실한 동역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인 제2차 선교사역 중에 바울과 함께 끝까지 동역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령
죽음의 칼이 도사리는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키 위해 많은 바울과 함께 동역 했습니다. 당시 많은 분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만류 했으나 아리스다고는 오직 바울의 결정에 묵묵히 동역하며 동행하였습니다.
또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호송 될 때 지중해 상에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파선의 위기 속에서 열 나흘간 동안 바울과 함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로 인하여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들이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충동시켜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원형극장에 끌고 가서 감금과 곤욕을 당하게 하였습니다.(행19:28-29).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동역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폭도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리스다고를 생각할 때 마다 복음의 동역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그의 헌신에 그 가슴으로 잊을 수 없는 그리운 나의 동역 자 아리스다고라 불렀습니다(몬 24절)
여러분
가정의 동역은? 함께 꿈을 꾸며 생각하며 함께 일하는 부부가 아닙니까? 세상의 동역은 세상을 빛으로 소금으로 스며드는 세상 속에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수도교회는 온 성도가 함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함께 울고 함께 울 수 있는 바울과 아리스다고 같은 동역의 목회 현장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셋째, 그는 바울의 동옥자(同獄者) 였습니다.  
“동옥자”란 “옥중에 같이 같인 자”를 말란다.
아리스다고는 바울과 함께 옥에 투옥 되었습니다(골4:10)빌레몬서에는 바울
이 "나와 함께 갇힌 자된 아리스다고”(몬2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삶은 세상 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이였습
니다. 그러나예수를 만나 후 그의 복음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요 험 난
한 순교의 길이요. 마지막 옥중이 기다리는 삶이였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를 해하려는 사탄이 공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면서 바울을 찾아 죽이려는 특공대 무리들이 40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행22:21)
바울자신 또한 고난의 삶의 연속임을 고백 하였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번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 하였습니다.(고후 11:23-28)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죽음을 전제한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행20:22∼38)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결국 바울은 예수 때문에 로마 옥중에서 죽음을 가다리게 되었고 그곳에 아리스다고가 함께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 바울 보다 먼저 순교하게 됩니다.
아리스다고가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나의 신앙의 아버지를 끝까지 보살피지 못하고 먼저 갑니다” 라고 남긴 그의 편지를 읽은 간수들은 죽음의 순간까지 바울과 동고동락 한 인간 아리스다고의 아름다운 인간미에 눈시울을 붉힙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수도교회는 누가 아리스다고와 같은 성도입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서 함께 복음의 동행 동역 동옥 자인 아리스다고 같은 성도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단 하루를 목회 하더라도 나와 함께 꿈을 꾸며 함께 생각하고 함께 "동행” 하고 함께 “동역”하고 함께 “동옥” 할 수 있는 아리스다고 같이 인간미 넘치는 성도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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