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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9/24/2017

주일예배 조회 수 578 추천 수 0 2017.09.25 08:16: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9/24/17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오늘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 말씀 하고 계십니다.
 
땅의 소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인이나 나라나 힘과 부와 영향력으로 상징되어 왔습니다. 때문에 사람이나 나라가 땅을 소유하고 그 땅을 지키기 위한 욕망은 역사의 종말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대영제국을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영제국은 남극을 제외한 전 대륙에 걸쳐 세계 육지 면적의 1/4를 땅을 정복하며 세계를 지배하는 영향력을 행사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여러 표준이 영국식이 된 것도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남긴 자국들입니다.
 
이처럼
땅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 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땅에 대해 무려 2504번 언급하고 있으며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 땅의 기업으로 받아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5:5)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땅에 대하여 이원론적으로 잘못 이해하여 내세적인 천국의 땅 만 축복의 땅이고 하나님이 주신 현세의 땅에 대하여 축복의 의미를 퇴색 시키고 또 현세의 땅과 내세의 땅을 단절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을 보십시다.
예수님은 “땅의 기업”으로 받는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5:5)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의 기업”은 하늘나라에서 받을 구원의 상급과 천국에서 누 닐 축복의 상속을 말씀하고 계시지만(시 37: 11, 29, 롬8:17) 그 천국 기업은 현세에 주신 땅의 축복을 경험하면서 영원한 땅을 소망하는 예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현제적인 축복의 땅인 동시에 영원한 천국을 표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관점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기업”을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입니다.
“온유한 자”입니다.
사전에 보면 온유한 자는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에 대한 긍정의 의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나 부정적인 의미로는 우유부단한 회색지대의 사람 아첨하고 비열하고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도 인식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한 사람”은 사전적인 온유의 의미나 선천적으로 온화함과 다른 의미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성령으로 변화된 온유한 성품입니다.
본문5절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본문에 “온유한 자” 말은? 헬라어로 “프라우스”(Praus)입니다. 이 “프리우스”란 말 가운데 “변화”란 의미를 동반 합니다.
가령, 사나운 짐승이 잘 훈련된 사냥개로의 변화된 상태의 변화입니다.
또 환자가 약을 먹고 고열에서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가 변화입니다. 뜨거운 바람이 불다가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 상태 등의 비유가 "프라우스“ 즉 온유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사람 심성에 적용하면
사나운 짐승처럼 과격한 심성이 성령의 변화로 성령의 열매인 온유한 성품이 되며 또 고온의 열이 정상의 열로 내려 온 것처럼 혈기의 심성이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의 성품이 되며 뜨거운 바람이 상쾌한 바람으로 변하듯이 사람의 관계 속에서 Trouble Maker에서 Peace Maker로 변화됨이 “프라우스”의 “온유”입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보면
주 예수 내 맘에 덜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마음에 오심.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변화의 능력이 계신 분입니다. 어떤 죄악도 어떤 나쁜 심성도 성령의 용광로 속에 덜어가기만 마치 금을 제련되어 나오듯이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를 가져 옵니다.
그러므로 주님 보좌 앞에 담담히 나아가서 주여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기도해 보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묵상 해보십시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로 온유한 심령이 되어 땅의 기업을 받는 행복한 성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2. 신뢰하고 순종 하는 성품입니다.
온유란 말인 “프라우스” 는 사나운 짐승이 잘 훈련받아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사냥개로의 변화됨을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
훈련과 변화를 받는 사냥개는 오직 주인만을 신뢰하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합니다.
온유한 사람 역시 성령으로 변화 받게 될 때 사람의 말을 듣고 시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순종하며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히브리인들은 온유한 사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헌신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신뢰와 순종의 온유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앞두고 내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아버지에 대한 절대 신뢰와 순종이 아닙니까?
오늘날 성도 가운데 이런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주여 이 폭풍을 지나가게 하옵소서 나의 원대로 하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마옵소서.
성도여러분
저녁에 울음이 있다고 해서 그 다음 날도 울음이 계속 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어제께 그렇게 세차게 불던 폭풍도 오늘 아침에 참으로 상쾌한 새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온유한 성도라면 이민의 삶 가운데 힘들고 지칠 때도 실망과 포기 속에서가 오직 주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기에 나의 폭풍을 잔잔케 하며 나의 눈에 눈물이 그치게 되며 주님의 한 줄기 희망이 빛을 주시어 땅의 기업으로 받는 행복한 성도로 축복해 주십니다.
3. 진정한 용기로 분노할 줄 아는 성품입니다.
분노?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분노 하지 말아야 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분노 화 혈기를 부립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분노를 일컬어 얼어붙은 분노라고 말합니다.
얼어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분노 때문에 서로 날카로워지기도 하고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상처를 주고 독한 말로 상대방의 감정을 뒤 집어 엎기도 합니다.
온유란 말인 “프라우스” 단어 속에 “분노”에 대한 분명한 태도의 의미가 있습니다.
분노에는 두 가지가 있다. 거룩한 분노와 이기적인 분노가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거룩한 분노를 발 할 줄 알아야 하며 자기 사욕의 생각으로 이기적인 분노는 내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의 거룩한 분노는 복음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사탄의 대적을 위해 공의를 위해 발하는 분노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비추어서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할 줄 압니다. 회색지대에 서지 않습니다. 사람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 목회중심에 서 있는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나 국가가 어려운 일을 당해보면 그 사람들의 온유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상시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국이 되면 그가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나와 가정과 자녀 보다 주님 뜻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이 약속하신 땅의 기업과 자자손손이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분노를 하셨습니다.
거룩해야할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무리들을 향하여 채 칙질 하고 상을 엎으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분노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거룩한 분노를 발 하셨습니다.
 
모세 또한 거룩한 분노를 발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산을 내려왔을 때 산 아래에 모여 있던 이스라엘백성들은 산 애래서 금송아지 우상 바벨론이 무용 신 우상 앗 수르의 별 우상을 만들어 절하고 섬기고 자기들의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려 합니다. 모세는 맹열한 분노를 발 하여 십계명인 두 돌판 으로 우상의 상징인 금송아지에게 부서 버립니다. 바로 거룩한 분노요. 온유한 자의 분노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분노는 반드시 참아야 합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자신이나 가정에 피해나 욕된 것을 들을 때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이는 모습이 마치 순한 양과 같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채 칙질 하고 욕하고 침을 뱉는 무리를 향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모세의 온유 역시 자기를 위해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민12:3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존경과 지도력을 인정받을 때 형 이론과 누님 미리 암이 배 아파서 동생을 시기하여 일종의 문제의 분란을 일으킵니다.
모세를 문제를 삼은 것은 이방여인과 혼인 한 것에 대한 시비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여인 십 보라와 결혼 하였으나 그가 죽고 그 후 구스여인인 흑인 여인과 재혼을 합니다. 미리암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 특히 흑인 여자를 아내로 맞을 수 있느냐 하며 여론을 퍼뜨립니다. 미리암은 신명기7장 3-4절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란 말씀을 인용 하며 터 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출애굽기 34:16절을 보면 가나안 족속의 아내로 삼지 말라고 명한 것이지 이방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인신공격에 일체 대적치 않고 자신의 수모를 하나님께 맡기는 온유함을 봅니다.
후일 하나님을 미리 암이 계속 모세를 비방하고 조롱 했을 때 문둥병자 신세가 되지 않습니까? 온유한 자가 모든 것을 주께 맡기면 주님이 공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면 오직 자기 자기가족 자기 유익에 빠져 서 주장을 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분노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온유한 자에게 분노가 아닙니다.
 
성도여러분
땅의 기업을 받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서 분노하지 말고 혈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해야 한다.
특히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 분노를 내면 안 됩니다. 주님의 일은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거룩한 분노를 발할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될 때 그 교회를 주님 축복하며 성도가 땅의 기업을 받으며 범사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4, 온유한자의 겸손입니다.
온유 즉 “프라우스”의 대립된 단어가 “훕셀로 카르디아”(hupselokardia)입니다. 그 뜻은 거만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내세를 부정한 허무주의 (虛無主義) 또는 니힐리즘(Nihilism)철학자로 살았습니다. 니체는 예수님의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한다. 는 말씀에 대하여 비웃었다.
예수님이 말한 온유는 약자의 덕 노예의 덕이지 강자의 덕은 아니라고 비웃었다. 그는 온유한 자는 세상을 살지 못한다. 그래서 니체는 힘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사람은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교만과 거만은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말년은 우울했으며 정신병원에서 10년을 병 투쟁을 하다 비참히 세상을 떠났다(1900년 8월25일 바이마르)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온유한 자는 쉴만한 물가에 삼기어서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는 형통의 축복인 땅의 기업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이 보장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거만과 교만한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실패 인생이 됩니다(시1편)
주님의 온유한 겸손의 성품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 합니다.
 
끝으로
오유한 자는 주안에서 주님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기 통제(self control)를 받는 자입니다.
온유인 “프라우스“는 한번 훈련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훈련과 통제를 받아야 사냥개로서의 역할을 잘 합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 만나서 변화 받고 성령 안에서 끊임없는 말씀 훈련과 성령님의 통제를 받을 때 계속적인 온유한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교회일이나 가정 일을 할 때 분노가 치밀어 올라 폭발 직전으로 올라 올 때 잠시 “주여” 라고 부르며 깊은 심호흡을 할 때 분노가 가라 않는 다고 하십니다.
헬라인들은 온유한 사람은 모든 본능과 감정을 잘 훈련시켜 조절력으로 지배할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잠언16:32에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가령
바울은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통제 할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하면서
주님의 통제를 요청 합니다.
반년에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가인은 결국 분노하여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범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 주위에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말씀으로 통제해 주시는 분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이기적인 분노를 부추기고 잘 못된 말을 전해주는 자가 있다면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혼에 결코 유익을 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온유한 성도가 되면 우리 주님은 내가 죄의 자리 오만한 자리 거짓된 입술과 잘못된 길로 갈 때 내 곁에 계셨어 나를 통제해 주시는 브레이커의 역할을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계속적인 통제를 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이 이름을 부르면서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택한 자녀를 은혜와 축복의 길로 인도하지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게 합니다. 주님께 나 자신을 송두리 체 맡기십시오. 그분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통제를 받는 온유한 자가 되어 땅의 기업을 받는 복된 성도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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