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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11/12/2017

주일예배 조회 수 310 추천 수 0 2017.11.13 08:58:38
 긍휼을 소유한 자는 행복 합니다.
    마5:7-12절
 11/12/17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예수님의 행복시리즈 다섯 번째 “긍휼을 소유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의 삶이
힘들도 지쳐 있을 때 하나님의 따뜻한 긍휼의 손길을 받을 수 있고 또 나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긍휼의 행복을 소유한 사람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행복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참으로 귀한 축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래된 일화입니다.
영국의 한 소년이 스코틀랜드 시골에 놀러왔다가 작은 호수에서 헤엄을 치든 중 발에 쥐가 나서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니 마침 그 소리를 들은 한 농부의 아들이 자신의 생명을 무릎 쓰고 뛰어 들어가 그 소년의 생명을 구합니다. 몇 해가 지나서 생명을 구함을 받은 그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을 찾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장래 희망이 무엇인가? 그 때 그 시골청년은 의학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도시의 청년 부모는 기꺼이 시골청년에게 교육비를 제공했습니다. 그 청년은 열심히 의학공부를 하였고 후일 온 인류와 의학계에 큰 공헌을 세우 게 됩니다. 그가 “페니실린”을 발견자(1928)이고 노벨상을 수상(1945)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한편 플레밍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도시 청년은 후일 영국과 전 세계로 부터 존경을 받은 유명한 정치가가 됩니다.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 끈 주역인 윈스턴 처칠입니다.
처칠이 2차 세계 대전 중에서 미국의 루르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과 회의 중 과로로 인한 폐렴으로 사경을 헤 멜 때 그 소식을 들은 플레밍 박사가 달려가서 자신이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그의 생명을 구하였다고 합니다.
 
성도여러분
처칠과 플레밍은 한 시대에 인류를 위한 위대한 도구로 쓰임 받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서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서로 “긍휼”의 마음을 소유 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써 보 았 싶습니다.
“긍휼이 여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될 것이요.
왜냐하면
성도가 먼저 주님의 긍휼은 입어야 긍휼을 베풀 수 있고 또 그 긍휼을 베풀 때 자신 또한 긍휼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긍휼”이란 말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속성 그 자체입니다.
긍휼을 헬라어로 “엘레오스”란 말인데요, 사랑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긍휼은 히브리어 개념으로 보면 어머니 자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궁에 임신한 자녀는 어머니의 사랑의 결정체가 아닙니까?
또 구약에서 긍휼의 의미를 지닌 말이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의 사랑인 “헤세드” 말과 그 뜻을 동반하고 있으며 이 “헤세드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표상 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긍휼을 소유한 “행복한 성도”가 될 수 있을까요?
I. 먼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수양이나 도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영원 전부터 있었고(시25:6) 그 지으신 모든 것에 미 친다”(시45:9)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 창조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 하셨지만 인간을 만드실 때는 자신의 형상에 따라 손수 흙으로 몸을 만들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 즉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천사 보다 더 귀하게 창조의 왕관으로 만드신 것입니다.(시8:5) 그리고 부족이 없는 행복의 파라다이스 에덴동산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홀로 있는 아담이 외롭지 않도록 돕는 베 필인 하와를 만들어서 서로 도우며 의지하며 행복한 부부로서 부족함이 없이 영원히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에덴에서 쫓겨납니다. 범죄 한 아담은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바위 뒤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어 긍휼의 옷인 가죽옷을 입혀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가죽 웃을 입히기 위해서는 어린양이 죽어 피를 흘려야 가죽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 어린양은 아담의 원죄는 물론 인간의 자 범죄에서 구원키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입니다. 양의 가죽옷은 바로 구원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은 호세아선지와 고멜 과의 결혼 생활에서 잘 계시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음녀(창녀)인 고멜(뜻:끝, 마지막)과 결혼토록 명합니다. 호세아가 인간적인 상식으로 선 듯 결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니 눈물을 머금고 순종하여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았습니다. 호세아가 낳은 아이가 과연 호세아의 아이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고멜은 결혼생활 가운데도 음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주어진 이름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이스르엘(Jezreel)하느님께서 씨를 뿌리심) 둘째 딸은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자) 셋째 로암미(내백성이 아니다)(호1;1-11)
이 세 자녀에 대해 어떤 견해는 첫째 아들만 호세아의 자식이고 나머지 둘은 호세아가 낳은 자녀가 아니다. 또 세 자녀 모두 음녀의 자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원문성경이나 NIV 영어성경에 보면 자녀에 대한 “그에게” 로 소유격으로 기록되고 번역됨을 볼 때 호세아가 낳은 자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후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집으로 데려 오기 위해 집장 촌장에게 몸값으로 은15개 보리 한 호멜 반(호3:1-5)을 지불하고 집으로 데려와 이전 보다 더 사랑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결혼 비유에서 호세아의 긍휼의 용서가 하나님의 긍휼의 사랑을 계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할 가치가 없는 우리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생을 주신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표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회복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정죄의 심판이 아닌 십자가의 은혜로 회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가령
영적으로 고멜은 하나님에 때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간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에게 숭배한 것을 뜻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제사장들의 타락을 포함한 총체적인 심판의 상징으로 새 자녀의 이름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멜이 집으로 와서 반성과 화개를 통해 신실한 결혼 생활을 하것 즉 이스라엘 벡성이 영적 간음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은 회복의 긍휼의 베푸셨습니다.
 
회복의 상징인 세 자녀의 이름의 회복이다.
첫째 아들 이름인 이스르엘(하나님의 씨 뿌림)에서 이스라엘(하나님 겨루어 이겼다)첫 딸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자)에서 부정의 의미인 루 빼고 루함마(긍휼의 여김을 받는 자)로 셋째 아들인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에서 로를 뺀 암미(내 백성이라)로 회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어떤 죄를 범해도 주께 돌아와서 회개하면 주님은 나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이전보다 더 사랑을 회복해 주시는 긍휼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삶을 돌보시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성도가 고통에 절망하고 지친 영혼들을 주님은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하갈의 고통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갈은 잉태함에 교만으로 결국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 광야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먹을 물이 없어 자식이 죽어하는 고통 앞에서 방성대곡할 때, 하나남이 하갈을 불쌍히 여기시어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시며 물을 먹게 하시는 긍휼 입니다.
욥의 환난을 돌보아 주셨습니다.
욥은 졸지에 닥쳐온 인생의 환난으로 10 자식이 다 죽고 재산이 다 떠나고 아내가 떠나고 자신의 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 속에 있는 욥이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은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돌보심의 긍휼은 불꽃같은 눈으로 택한 백성을 지키고 돌보십니다.
주님의 돌봄의 긍휼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환난 속에서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부여잡고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네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 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그럼
어떻게 해야 내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요?
내 마음을 다 비워야 합니다.
죄의 자리로 이끄는 욕심 죄의 씨앗인 시기 질투 미음 증오 살인 교만 그리고 인생의 무거운 짐까지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 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그 회개와 고백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빈 마음에 우리 주님 성령이 오셨어 주님의 마음인 긍휼로 가득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주님 주신 새 생명의 심령에 주님의 긍휼을 덧입혀 질 때 새 존재 New Being가 된 것입니다.
 
2. 이제 주님의 긍휼을 입었다면 그 긍휼을 이웃에게 나누어야 긍휼의 행복을 받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치 달이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하듯이 저수지에 물이 가득하여 자연스럽게 넘쳐흘러내려 가듯이 내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로 가득 채워지면 스스로 빛처럼 물처럼 열처럼 “긍휼히 여기는 사랑의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감의 긍휼입니다.
“공감의 긍휼”은 그 사람 정말 불쌍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에 “동고동락”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어떻게 공감의 긍휼을 행할 수 있습니까?
공감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의 눈이 긍휼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17세기 아프리카가 서구의 식민자화 되었을 때 백인들이 본 아프리카는 황금의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황금은 보이지 않고 흑인들만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백인들의 눈에 보인 흑인은 사람으로 보기 보다는 노예로 삼았고 짐승처럼 매매했습니다.
반면에 선교사 리빙스턴의 눈에 비친 흑인은 영혼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선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의 눈입니다. 이 눈이야 말로 공감의 긍휼히 여기는 자의 눈이 아닙니까?
긍휼의 귀를 가져야 합니다.
긍휼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야 한다. 불행한 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공감의 긍휼을 나눌 수 있습니다.
긍휼의 발을 가져야 합니다.
공감의 긍휼을 베풀 자를 만나면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온정을 베풀 수 있습니다.
긍휼의 혀를 가져야 합니다.
나의 혀가 남을 비판하고 악담하고 거짓과 살인의 혀를 가지면 공감의 긍휼을 나눌 수 없다. 나의 혀가 위로하며 용기를 주며 믿음의 혀가 될 때 공감의 긍휼을 줄 수 있습니다. 긍휼의 손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의 손을 가져야 약한 형제들을 위해 친히 손을 펴서 구제할 수 있고 봉사할 수 있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이팅게일의 손, 주님은 나병환자의 손을 직접 만지며 치유했습니다. 공감의 긍휼의 손의 본을 보여준 분이 있습니다.
공감의 긍휼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 인입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도,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레위 사람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을 덜어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옵니다. 여관주인에게 여관비를 지불하고 돈이 모자라면 내가 다시 돌아와서 지급하겠으니 이 강도 만난 자을 잘 돌봐 달리는 말씀입니다.
누가 공감의 긍휼을 베푼 자 입니까?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 인이 아닙니까?
반면에
달란트 비유를 보면(마18)공감의 긍휼을 받고도 행치 않는 자의 고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빗을 졌습니다. 그 빗은 당시 돈으로 주인이 탕감해 주지 않으면 평생 갚을 수 없는 돈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보시고 이 빚을 탕감하여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데 빗을 탕감 받은 종은 그 임금의 긍휼하심을 본받아 자신도 이웃에게 이 같은 긍휼을 베풀었어야 하는 데 자신에게 빚진 동관 하나에게 100 데나리온의 적은 빚을 갚지 않는다고 관에 고발하여 옥에 가둔 것입니다. 100 데나리온이란 20달라 정도의 적은 돈으로 일만 달란트에 비해 50만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입니다. 이 소문이 임금에게 들렸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부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1만 달란트와 비교 할 수 없는 죄를 빗을 값없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탕감 받았습니다. 그 빗 값을 무엇으로 갚을 까? 그 빚 갚는 방법이 바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의 삶이 아닐까요?
3.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어떤 긍휼의 행복을 소유 할 수 있을 까요?
본문에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긍휼을 받아야 할 때에 우리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긍휼을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위로와 인도의 긍휼을 받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교만과 죄를 회개할 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띠 우셨나이다. 고백 합니다.
!!) 형통의 축복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형통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시1편처럼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남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면 나의 영혼이 살찝니다, 물질의 긍휼을 베풀면 물질의 풍성함을 받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봉사의 긍휼의 손길은 건강의 긍휼의 축복을 받습니다.
평강이 있습니다(딛1:2).
마음의 평강을 원하시면 긍휼을 베푸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감옥은 용서하지 못하는 증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또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장 비참해 지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잠11:7). 그 심령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습니다.
마25:31이하를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올 때, 모든 백성을 모우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앞에서 양과 염소를 구분합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니라 그 때에 주님은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바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오른편에 세우시고 창세로부터 예비 된 축복을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긍휼의 행복을 소유하길 원하십니까?
주님으로부터 긍휼의 마음을 덧입어서 남을 긍휼히 여기므로 긍휼의 행복을 주님으로부터 소유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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